느닷없이 술 한병과 카드 한갑을 들고 불쑥 찾아온 친구의 한마디였다. 술과 여자와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좋아하여 번화가의 중심에 감초처럼 앉아있곤 하는 녀석이었지만 이번에 애인을 사귀더니 자제하려고 하는걸까, 그저 많은 변덕중에 하나인걸까. 거절의 가능성은 염두에도 없는지 어느새 탁자에 술잔을 세팅해놓고 패까지 돌리기 시작하는 션의 뻔뻔함에 딱히 할 일도 없었던 가야넬은 간만에 친구와 오붓한(?)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좀 좋은 술 좀 가져오지 이게 뭐냐."
"술도 못하면서 편식은. 어짜피 내가 거의 다 마실텐데 취향좀 존중해주시죠."
체스라면 확실히 션을 꺾을 수 있을 자신이 있건만. 카드는 좀 다른것이 션과 자신의 실력차 뿐이 아니라-
"션. 너 자꾸 카드 꺼낼래."
"엣 ㅇㅂㅇ 봐, 아무것도 없는걸."
속임수에 능수능란한 저 손놀림 때문이다. 현직 사낭꾼 가야넬의 시선도 날카로웠지만 단순한 뒷골목 손장난이 아닌 션의 움직임도 무시할게 못되어 션이 순수한 실력으로 자기보다 우위인지 속임수 때문인지 답하려면 모르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것이 사실이었다.
결국 실력에 밀린건지 속임수 때문인지, 아니면 션이 은근히 끈질기게 부어주는 술 때문인지 가야넬은 장렬한 노력 끝에 게임에 패했고 션이 상으로 가져가겠다며 집어든건 조카 주려고 사둔 인형이었다. 빙글빙글 웃으며 리카가 좋아하게 생겼다고 인형을 어르는 션을 보고 니 애인 선물은 니가 사라고 엉덩이를 걷어찬것도 같다.
왜 같다-냐면 다음순간 가야넬은 침대 위에서 아침이 왔다 지저귀는 새들과 지독한 숙취 사이에서 눈을 뜨느라 전날 밤 기억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설원
"설원씨."
돌아보는 설원의 손목에 감긴 붕대를 보고 가야넬은 속으로 혀를 찼다. 힘조절 한다고 했는데. 언젠가 장난으로 시작된 팔씨름 후 가야넬이 설원을 놀린다고 던진 한마디가 불씨가 되어 제법 (일방적으로)진지해진 겨루기가 되고 말았다. 이길때까지는 찾아오겠다며 하루가 멀다하고 도전장을 던져오는 설원이었지만 어디 서점 직원과 활잡이의 팔힘이 같은가. 악력부터 달랐다. 조심한다고 힘을 빼면 진지하게 임할것을 부탁해오고 조금 힘을 많이 줬다 싶으면-
"게인씨, 걱정 말아요. 이정도 삔건 며칠이면 낫는걸요!"
붕대를 향한 시선을 알아차리곤 되려 가야넬을 안심시킨다. 둥글게 휘는 검은 눈동자가 맑다. 미안한 마음이 커진다.
"정말 괜찮다니까요?"
"자잘한 부상이라도 여러번 반복되면 좋지 않아요."
"그래도 남자대 남자의 대결을 포기할수는 없잖아요? 집에 돌아가기 전까지 게인씨를 꼭 이겨보이고 말겠어요!"
양 주먹을 불끈 쥐며 굳은 다짐을 하는 설원을 두고 가야넬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정말이라구요!"
"...네..."
차마 그러실수 있겠죠- 하는 말은 못하고 방황하던 가야넬의 시선이 들고있던 종이뭉치에 멎었다. 오늘 부상을 입은 설원이 팔씨름을 하러 오지 않을것을 알고서도 찾아나선 이유이다.
"설원씨, 이것."
"?"
"서점에서 일하셨다면서요. 책을 좋아하실까 하고요. 벨루브양표 리벨-지구어 사전이라고 할까요. 어려운 책은 무리겠지만 간단한 책같은건 해석 가능하다고 들었어요."
"오오오... 감사합니다!"
두툼한 종이뭉치를 들고 설원이 기뻐한다.
"고생한건 벨루브양인걸요. 어린나이에 참 대단하죠."
"그러게요! 벨루브양 보면 정말 고맙다고 꼭 전해주세요!"
그간 읽지 못한 책을 읽어봐야겠다며 작별인사도 잊고 왕실도서관으로 달려가는 설원을 가야넬이 따듯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한시름 덜었다. 한동안은 책을 읽느라 팔씨름은 잊고 지내겠지.
세실 비튼 허스키
이번 사냥 여행은 성과가 좋았다. 어느새 험한 숲길로도 능숙하게 잘 따라오는 소(So) 덕분에 가져올 수 있는 사냥감의 양도 늘었다. 소가 등 가득 짊어졌던 짐들을 내려놓고 느긋하게 풀을 뜯고있는 동안 가야넬은 흥정을 하고 한결 개운해진 마음으로 가게를 나섰다. 주머니도 묵직하겠다, 일찍 돌아가서 씻고 자야지. 이사람이 나를 죽였다 표시하듯 끈질기게 묻어온 깃털을 옷에서 떼어내면서 소를 부르려던 참에 어딘가 익숙한 뒷모습이 눈을 끌었다. 누구였더라. 옷만 보면 가끔 보이는 주위 귀족 집안 자제인데. 아니, 그것 말고 다른곳에서- 갸웃하며 생각하던 참에 바라보던 시선을 느꼈는지 회색빛 머리가 이쪽을 향해 돌았다. 붉은 눈과 마주침과 동시에 서로 알아봤다.
"허스키 씨!"
"…"
반가운 얼굴을 보고 밝게 인사부터 했지만 말끔한 상대의 옷에 비해 여기저기 숲의 흔적이 남아있는 자신의 차림새를 의식하면서 가야넬은 먼지가 날리는 머리를 한손으로 살살 쓸어넘겼다. 역시 좀 씻고 나올걸 그랬나. 다른쪽 손을 옷에 슥슥 닥고 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 서있는 세실에게 내민다.
"안녕하세요 허스키 씨. 한달만인가?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깨끗이 닦았다고 닦았지만 그래도 먼지가 묻어있어서일까. 세실은 움직이지 않았다. 머쓱해진 가야넬은 어쩔 수 없다는듯 어께를 한번 들썩이고는 손을 거두었다. 원래 조사단에서도 어울리기 좀 힘든 사람이었다. 애인과 교제를 시작하고 유해졌나 싶었는데.
"오르이피엘 씨야말로 조사단 명부에서 이름까지 빼고서는 아주 잘 지낸것 같군요."
"음. 사람 체질이 어디 가겠습니까. 겨우내 집 수리도 해야해서 수도에 머무를수가 없더군요."
실베론이 알려준걸까. 다들 알고있는걸까.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저 웃는 가야넬에게 작은 편지가 내밀어졌다.
"실베론에게 받았습니다. 그간 열심히 국가를 위해 노력해준 보상을 원하신다면 서신을 보내라고 하시더군요. 저를 전령으로 쓰다니 늙은이가 아주 간이 부었습디다."
"아, 그럼 일부러 여기까지 오신건가요?"
"아니. 잠깐 집에 들린 참에 오르이피엘 씨가 보여서 드리는 겁니다. 이런쪽으로 운이 좋으시군요."
"감사합니다."
가야넬이 편지를 받아들자 세실은 그대로 몸을 돌릴 듯 하더니 잠시 가야넬을 보고 섰다.
"...?"
"다음 추수감사제. 참여 꼭 하시기 바랍니다."
추수감사제란 말에 가야넬은 갑자기 등이 서늘해지는걸 느꼈다. 저번 추수감사제에.. 음. 그러니까.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까."
메리 밀키웨이
캐시 사서님- 문득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낮익은 얼굴이 보였다.
도서관 요주의 손님으로 평소에도 어디 있는지, 뭘 하는지 이따금 체크를 필요로 하는 아가씨의 미소는 밝았다. 웃고있지 않을때가 드문 그 얼굴을 잠시 살피다 캐시는 적어도 지금은 도서관 규칙을 어기는 행위를 하고 있지 않다 판단하고는 잠시 힘이 들어갔던 미간을 편다.
"메리양."
"아이 사서님- 저라고 항상 말썽 피우는건 아니잖아요~"
붙임성 있는 목소리가 애교있다.
"방심하면 사고를 치시니까요."
"사서님 저 섭섭해지려고 해요?"
"사실인걸."
살짝 부푸는 볼에 얼마나 많은 사서들이 넘어갔을까.
캐시의 눈이 가늘어지자 메리가 웃었다.
"왜 부르셨나요."
"아 사서님, 저 책좀 찾아주세요."
"제목이 뭐죠?"
"-"
메리가 말한 책의 제목에 캐시는 잠시 멈칫 했다. 신간이다.
"컴퓨터에서 찾아봤더니 도서관에 있다는데. 아무리 찾아도 안보이지 뭐에요."
"누가 꺼내갔나보죠."
"아이 사서님두. 그 작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구요."
알다마다. 그래서 들키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취향이 비슷한것이 이럴때 불편할 줄이야.
있으면 이쪽에 있을텐데- 하고 캐시가 책을 읽은 뒤 꽃아두려 했던 곳을 가리키며 돌아본다.
알고 저러는건지, 몰라서 묻는건지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보며 캐시는 남몰래 식은땀을 흘렸다.
하인츠 웨어
하루종일 신경이 날카로웠다.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한다는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캐시였지만 오늘은 필요 이상으로 정숙을 외치고, 사서들을 들볶고, 여러모로 도서관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는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신입사서 하나를 울리고 나서야 캐시는 드물게 근무시간 교체를 부탁하고 카페테리아에 코코아 한잔을 마주보고 앉아 평정심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
문득 무슨 소리가 들린것 같아 눈을 들어보니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청년이 서있었다. 이미 몇번 부른 기색에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 기분으론 전혀 손님을 웃으며 대할 기분이 아니었다. 사서실에 갔어야 했나.
"죄송하지만-"
"누님, 괜찮아요?"
이사람은 왜 이렇게 또 친한척일까. 두어번 다른 사람들과 다툼이 있었을때 도움을 받긴 했지만 어짜피 이기고 있던 싸움이었고, 필요없는 도움이었지만 도움은 도움이라 감사하다 말하긴 했는데 그걸로 친해졌다 느낀걸까. 간신히 가라앉혔던 짜증이 다시 밀려왔다.
"웨어 씨. 죄송하지만 지금은 대화가 곤란합니다."
이정도면 가지 않을까 싶었는데. 명백히 날이 선 목소리에 한참 어린 꼬마는 잠시 주춤하는듯 싶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형수님이 누님이 걱정된다고-"
"웨어씨 형수님이 언제 저를 봤나요?"
울컥 하는 마음에 한마디 쏘아붙이자 파란 눈이 당황한듯 깜박였다. 이 참에 아예 정을 떼어버리자 하는 마음에 캐시는 몇마디 더 덧붙였다.
"웨어씨는 있었던 일을 다 형수님께 고해 바치나요? 가족이라 닮았나 오지랖이 넓은것도 정도가 있지, 댁의 형수님은 왜 제가 걱정된대요?"
이번엔 정말 당황했다. 얼어버린듯 움직이지도 못하고 눈만 깜박이는 하인츠를 앞에 두고 그러게 거절할때 가지 그랬냐고 잠시 고소한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한참 어른이 어린애 데리고 이게 무슨짓인가 하는 생각에 한숨을 쉬었다.
"...우리 학교 축제에... 누님이랑..형수님이랑..."
아직도 앞에 서있는것을 무시하고 코코아 컵을 만지작거리던 캐시의 귀에 더듬더듬 조심스러운 하인츠의 설명이 닿았다. 얼마전에 놀러간 대학교 축제에 웨어 씨를 만나긴 했는데- 캐시는 놀라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나지 않는 기억을 돌아보고자 읽었던 일기엔 잊혀진 친구와 갔던 축제가 기록되어 있었고, 거기서 우연히 만난 도서관 손님이 그 친구의 도련님이더라, 어쩜 이런 인연이 있나 하고 웃었다던 글귀가 그제서야 떠올랐다.
레이 힐베르트
익명님께서 써주신 썰에서 이어집니다
일냈다.
순간 무슨 말을 할 겨를도 없이 화가 치밀어 있는 힘껏 내질렀지만 설망 한방에 뻗을 줄이야. 종이 내구도가 형편없다며 캐시는 기절해 있는 바벨의 도서관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다행히 이 충격적인 도서관 폭력 사건을 목격할 사람들은 주위에 없었다. 캐시는 세상 모르고 널부러져있는 레이를 이대로 내버려둘까 고민하다 한숨을 내쉬며 들쳐업었다. 지고 못하는 성격에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 역시 종이라 무게가 만만치 않아 우여곡절 끝에 사서실 소파로 옮겨진 레이는 캐시가 노려보며 간식을 다 까먹을때까지 정신을 잃고 있었다.
다시 여기 버려두고 갈까 갈등하던 차에 낮은 신음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감겨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천장을 확인하고, 퍼뜩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던 레이가 캐시를 발견하고는 펄쩍 뛰었다.
"저-저리가 이 폭력사서야!"
"조용히 하세요. 여자 주먹 한방에 기절한 약골이 뭐가 잘났다고."
"야...약고↗올↗?! "
제법 분했던지 삑사리까지 낸 레이는 곧이어 도서관 사서가 이럴 수 있느냐, 고소하겠다며 소파 위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해보세요. 하나도 안무섭네. 신변확인이 안되서 혼자서는 책 대여도 못하는 분의 고소가 접수되기는 할까요?"
물론 손님을 때렸다는 소문 등 도서관 내 여론조성은 가능하겠지만 그걸 알려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이번에는 책의 권리도 존중해주지 않는 이런 야만스러운 곳이 어디있냐며 궁시렁거리기 시작했다. 캐시는 기가 차 잠시 인권따위 자유의사따위 깡그리 무시하고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10주를 선사해준 장본인을 지켜보다 더 있다가는 또다시 주먹이 나갈것 같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행히 레이의 입은 캐시가 일어남과 함께 다물어졌다.
"레이씨. 나 뒤끝 있어요. 레이씨 때문에 팔자에 없는 개고생 한것 잊을 수 없고, 잊지 않을거야. 당신이 도서관에 들어오는것은 막을 수 없으나 남한테 폐가 되는 짓은 작작좀 해요. 당신이 읽을 책따위는 당신이 빌려."
분노를 감추지 않은 시선들이 잠시 허공에서 부딪혔다. 먼저 시선을 거두고 돌아선것은 캐시였다. 차분히 방을 가로질러 도서관으로 나가는 문을 열고 흥분이 한층 가라앉은 눈으로 레이를 돌아보았다.
"그걸 못하겠으면 빌리지 말고 도서관 내에서 해결봐요. 당신은 똑똑하니까 잘 할 수 있을거잖아."
스벤 소델스트롬
레이씨 썰에서 이어집니다. 따로따로 올리는것은 제 마음이니까>.6*
대꾸따위 듣지 않겠다는 집념으로 마지막 한마디를 하자마자 문을 닫고 카운터 로 걸음을 옮겼다. 다이아나는 너무 물러 막무가내로 부탁하면 넘어간다. 덕분에 그런 기상천외한 경험을 하고도 계속 책 대출을 도와주고 있는것이 답답해 며칠동안 근무시간 교체를 부탁했었다. 레이 때문이었던걸 알면 분명 화 내겠지. 머리가 아파온다.
카운터 뒤 자리를 다시 찾았을때 눈에 띈 것은 도서관 로비를 배회하는 커다란 덩치였다. 스벤이라고 했던가. 그 괘씸한 도서관의 애인. 레이는 용서할수 없었지만 스벤은 별개였다. 사랑은 장님이라 누구든 맞추어 바보로 만든다던데 책속의 사람이라는 별난 생물체와 연이 닿은 것이 어디 스벤의 잘못이겠는가.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 커다란 덩치에 까만 옷, 거기다 문신까지 하고 두리번거리며 여기저기 튀어나오는 통에 분위기가 살짝 어수선해지자 캐시는 한숨을 쉬며 스벤을 부르려 고개를 들었다. 손짓도 하지 않았는데 큰 덩치의 청년은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다가와 섰다.
"소델스트롬씨."
조용한 인사에 고개를 끄덕인 청년은 캐시가 입을 열기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씨 찾는거죠?"
끄덕.
"사서실에 있으니까 데려가세요."
바로 몸을 돌리려던 스벤은 잠시 망설이더니 다시 캐시를 보고 섰다.
"...기절했거든요."
"...."
"제가 때려서."
"......."
화를 낼거라 예상했는데 웬걸, 오히려 살짝 창백해지는 스벤의 얼굴을 보며 캐시는 기분이 묘해졌다. 책의 세계에 다녀온 사람들이 어딘가 저를 무서워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도대체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는것인지. 지금같은때는 오히려 다행인것일까 생각하며 캐시는 말없이 색 외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는 스벤의 시선을 맞았다. 더 이상 설명하지는 않을테다. 레이의 낮짝이 이루 말할수 없이 두꺼웠던것은 사실이지만 때린건 때린거니까. 한방에 나가 떨어질거라고는 예상 못했지만 기절하긴 했으니까.
얼마나 마주보고 있었을까. 주위를 탐색하듯 제자리에서 천천히 한바퀴를 돌은 스벤은 다시 캐시를 향해 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저... 사서실이 어디입니까."
이네흐 나란
"아오, 이 꼬꼬마들을 그냥-"
여름방학이 끝난 직후에 종종 있는 일이라지만 이번엔 정도가 심했다. 벼락치기로 방학숙제를 하느라 도서관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던 독후감용 책, 자료책, 교과서, 그저 재미로 읽으려 빌려갔다가 잊혀지고 개학이 시작되고서야 돌아온 책들- 제때제때 숙제 하고 제때제때 책 반납하면 죽을 병이라도 걸리는지. 하필 늦은 휴가를 받아 자리를 비운 고참사서들이 많은 이 때에. 정리해야할 책의 산을 바라보며 캐시는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이제 하루 이틀...최악의 상황엔 일주일정도는 비슷한 양의 책들이 반납될것이기에 처음부터 밀려버리면 큰일이 난다.
"제가 하겠습니다."
"당연히 같이 해야죠."
이 작은 사서는 매사에 성실해서 좋은데, 뭐든 혼자서 하려고 해서 문제다. 일을 못해서 그러는가, 그건 아니었다. 1mm의 오차도 참지 못하는 모 사서님만 못하지만 깨끗하고 각잡힌 정리정돈이라던가, 무슨 업무를 맡던 깔끔하게 일을 잘해낸다. 혼자서.
이 큰 도서관을 한사람이 다 관리할 수 있는것도 아닌만큼 다른 사람과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할텐데, 이 사서님은 굳이 혼자 하겠다고 할 때가 많았다. 덕분에 편한건 동기들로, 이네흐에게 일을 부탁해놓고 살살 도망가는걸 본 적이 몇번 있었다. 지금 이렇게 우기는것도 빠른 퇴근을 희망하는 누군가의 속삭임 덕분이겠지.
캐시는 조만간 이 불쌍한 어린 사서를 위해서라도, 그로 인해 해이해지는 도서관 업무정신을 위해서라도 이네흐 사서님께 팀웍, 아니 적어도 다른 사람의 일을 떠맡는건 마다하는것을 가르쳐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단호박만 먹여서 땡이라면 참 쉬울텐데.
"저로 충분합니다. 다른 사서님들은 이만 퇴근하셔도 좋습니다."
"앗, 이건 뭘까요? 이렇게 후배가 선배 밀어내도 되나요? 이러다 나 사서복 벗게 되는거 아니에요?
"아 아닙니다! 그런건 절대..."
"그런거 아니면 혼자 한다는 말은 말아요."
딱딱한 말투는 심성이 고압적이어서가 아니라 달리 말재주가 없어서다.
살짝 놀리자 금새 쩔쩔매는 모습이 생각하던 대로다. 거기다 이네흐의 말에 퇴근을 기대하며 설레던 사서들의 눈이 다시 시들어가자 캐시는 짐짓 화가 난 표정을 유지하느라 애를 써야 했다.
어린 사서님들. 세상에는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많답니다.
베니
카페테리아. 도서관 내 모두에게 허락되고 음식물 섭취가 가능한 유일한 구역. 손님들도 많지만 간간히 사복 혹은 사서복 차림의 사서들도 보인다. 캐시는 사서복을 입고 베르테르 대리인의 손놀림을 따라 눈을 움직이는 아가씨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완성된 그의 작품(?)들을 받기 위해 작은 손이 내밀어진다. 손을 감싼 장갑이 희다. 양손에 커피 한잔씩을 들고 두리번거리기에 손을 흔드니 긴 치맛자락을 팔랑이며 걸어온다. 곱게 땋아내린 양갈래 머리가 귀엽다.
"캐시~ 용케 자리 찾았네?"
"마침 자리가 났어. 운이 좋지?"
커피 한잔은 캐시 앞에 한잔은 제 앞에 내려놓고 앉아 재잘대기 시장한다. 도서관 이야기. 손님들 이야기. 이번에 치킨집 생겼다던데 가보았느냐. 거기 맛있다던데-
"사달라고?"
"앗 너무 티가 났나~ 언니 밥 한번 산다고 했잖아~ 조만간 퇴근시간 맞춰서 먹으러 가자. 응?"
"베니가 말할정도면 진짜 꽤 됐나보다. 매주 강제소환 되는바람에 정신이 없어가지구. 그럼 간만에 데이트나 해볼까?"
"올ㅋ 데이트~"
손뼉치며 까르르 웃는걸 보니 꽤 먹고싶긴 했나보다.
귀여운 후배 협찬의 쓰지 않은 커피 위의 휩크림을 빨대로 떠먹으면서 비로소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구나, 캐시는 생각한다.
다이아나 에릭슨
"내가 얼마나 자주 오는데 아직까지 이름을 못 외운거야? 사서님 실망이네."
"도서관에 선생님만 오시는거 아니잖아요. 얼굴 외우는것만도 힘든데."
"아 글쎄 생각해보라니까."
멋진 중절모를 쓴 노신사가 눈을 반짝인다. 지긋한 나이에도 장난끼가 자글자글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그는 잠시 책을 대출하거나 반납하러 올 때에도 한두마디 담소를 건네곤 했다.
"조금만 더 기억하면 생각날 거야."
"으음, 역시 모르겠는걸요-"
"아달스타인 선생님."
"맞아 그거야!"
조금이나마 노력을 해보던 캐시의 옆에서 정답이 나왔다. 옆에서 같이 카운터를 보던 다이아나였다. 아달스타인 할아버지는 신이 나 캐시를 돌아보았다.
"저 사서님은 기억하는데 왜 자네는 못하누?"
"다이아나 사서님이 특별하니까요."
캐시의 칭찬에 다이아나가 약간 불편한듯 몸을 틀며 얼굴을 살짝 붉혔다.
"캐시 사서님, 그정도까지는 아닌걸요-"
"어머 사서님, 이런건 생색 좀 내셔도 되는 재능인걸요?"
캐시가 다이아나를 띄워주자 줄에 서 있던 다른 할아버지가 슬쩍 앞으로 나왔다. 아달스타인 할아버지의 친구로, 역시 장난끼가 많은 분이다.
"그럼 내 이름은?"
"브라우너 선생님."
"내 이름은?"
"언니 내 이름도 알아요?"
다이아나가 이름을 정확하게 말하자 줄서있던 손님들이 하나 둘 질문을 던진다. 약간 당황하던 다이아나는 느리지만 정확하게 손님들의 이름을 말했다. 그 와중 카운터 주변이 다소 소란스러워졌지만 의외로 캐시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이윽고 사람들 대출을 다 돕고 처음 발단이 되었던 신사분도 가고 나서 주변이 조용해지자 한꺼번에 사람들 주목을 받는 일에 익숙하지 않던 다이아나는 뒤늦게 손부채를 살살 부쳤다.
상대방이 내 이름을 기억해주면 상대방한테는 내가 그만큼 기억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 느끼게 되고, 상대방의 이름도 기억하려 노력하게 되지. 다이아나가 이름 기억해주는걸로 손님들 기분 좋아하면서 갔을껄? 사서님은 이미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과 친해져 있어요."
다 그렇게 친해져 가는거야~ 하고 짐짓 아는 체 하는 캐시를 보며 다이아나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폴 페르메
하루의 정리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도서관을 한바퀴 돌던 캐시는 아직 불이 켜져있는 사서실을 들여다보다 책상 위에 반듯이 앉아있는 인영이 눈에 띄어 안으로 들어섰다. 반듯한 자세로 책상 앞에 앉아 책을 들여다보는 모습은 분명-
"폴씨. 아직 퇴근 안하셨나요?"
"... 아 네. 책을 좀 읽고 있었습니다."
문을 여는 기척도 알아채지 못할만큼 열중해 있었던 걸까. 캐시가 말을 걸자 폴은 살짝 놀라는 낌새를 보이며 올려다보았다. 방금전까지 쓰고있던 노트가 보인다. 얼핏 봐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무슨 책이길래... 오, 평소에 읽는 책과는 조금 다르네요?"
"전공서입니다."
"평소 신화나 종교서적을 많이 읽으시길래 그쪽 전공이신가 했는데."
"흥미위주입니다. 사람들이 믿는 세계관이 흥미로워서요."
전공이라. 그러고보니 폴은 사서들중 젊은축에 속했다. 하루종일 일하니 휴학인걸까. 학기중에도 해이해지기 쉬운게 공부인데. 캐시는 폴이 그의 느긋한 첫인상과는 다르게 착실하다고 생각했다.
"재미있네요."
"네?"
"내가 퇴근하면 이 도서관엔 수위아저씨랑 폴씨 뿐이잖아. 이 큰 도서관 전체가. 폴씨만을 위한 공부방이에요."
그런가. 하고 갸웃하는게 보였다. 큰 도서관 전체보다 도서관의 사서실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캐시는 사서실보다는 도서관 전체가 좀더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퇴근 직전이니 조금의 낭만을 즐겨도 괜찮지 않을까.
"방해는 이만 하고 전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폴씨는 너무 늦게까지 공부하지는 마세요. 그러다 또 도서관이 폴씨를 집어삼킬지도 모르니까요."
원인이 사라져 정말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가벼운 농담이라기엔 캐시에게도 폴에게도 조금 무거운 이야기를 하며 캐시는 일어섰다.
"무사히 빠져나오더라도 내일 근무할때 힘들수도 있으니까."
러스티
톡. 톡톡.
부스스한 주황색 머리는 몇번이나 건들여도 미동이 없다. 캐시의 눈이 가늘어지기 시작한다. 저번에도 경비아저씨께 혼나는 모습을 본적이 있는데. 버릇이 통 고쳐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상습범이야 상습범. 평화로이 꿈나라를 헤메이는 얼굴을 보면서 캐시는 생각한다.
"손님."
무반응.
"손님. 여기서 주무시면 안됩니다."
잠시 움칫움칫 표정이 일그러지는가 하더니 웅얼거리며 얼굴을 돌려버린다.
"하는 수 없네요. 경비아저씨를 불러야겠어요."
'경비아저씨' 라는 단어가 효과가 있었는지 돌아서는 캐시의 치맛자락이 불쑥 튀어나온 손에 잡혔다.
"안돼요! 사서님 제발 저 안잤다구요 그냥 눈만 살짝 감은건데..! 눈만 감았던 거라구요 제가 도망가는 책을 잡으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볼 한쪽에 빨갛게 눌린 자국이 선명하다. 졸음을 눈에 한가득 담고 비뚤어진 안경을 알아채지도 못한채 잠이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애원 반 꿈 내용이 분명한 말 반을 좌르르 쏟아낸다. 한번만 더 걸리면 몇달간 출입금지라더라, 필사적으로 매달려오는 손길에 캐시는 잠시 휘청했다 다시 중심을 잡고 섰다. 상황파악이 되질 않는지 그 와중에도 잠을 자지 않았다 횡설수설이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대며 잡아오는 손길에 캐시는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볼을 가볍게 찰싹찰싹 두드렸다.
"정신 차리세요 손님."
한창 혈기왕성할 나이인데 왜 병든 닭마냥 여기저기서 곯아떨어지는건지. 차라리 집에가서 잤으면 하는데 책을 좋아해선지 이 잠만보 소년은 자주 도서관에 들리곤 했다. 그리고 책을 열심히 읽다가 그대로 책속 세계에서 꿈나라고 직행하고.
이제 겨우 정신이 좀 드는지, 꼬마 손님은 잡았던 치마를 놓고 안경을 고쳐쓰며 눈을 깜박이더니 이윽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덕분에 주근깨가 한결 돋보이는 얼굴에 아무렇지 않은듯한 표정을 하고 옷매무새를 고치더니 서너톤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내온다.
"사서님께 실례 많았습니다."
그 모양새가 어찌나 웃기던지, 캐시는 도서관 내 숙면죄, 그에 이은 소란죄를 잊을정도로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느라 다음부턴 조심하시라고 주의만 주고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