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돌에 깔려 죽는다. 죽는다. 살아남으려 숨을 크게 들이키며 하루카는 잠에서 깼다. 하지만 꿈에서 느꼈던 묵직함은 그대로였다. 마코토. 마코토 좀... 없는 숨을 겨우 쥐어짜내 낸 목소리에 부드러운 털이 보송한 귀가 쫑긋 서더니 이내 하루카의 몸 위에 자리잡고 있었던 무게가 후닥닥 물러났다. 어제 또 천둥이 쳤니. 부족했던 산소가 한꺼번에 공급되는 느낌을 즐기며 나지막히 묻자 손에 부드러운 머리가 들이밀어지는게 느껴졌다. 큰 덩치에 맞지 않게 무서운것도 많은 이 수인은 강아지적 버릇대로 하루카의 몸 위에서 안정을 찾고는 했다. 하루카보다 키가 커진 덩치로 내리누르면 어김없이 하루카는 꿈속에서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주인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것을 이제야 알아차렸는지 끙끙대며 겨드랑이쪽으로 파고들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대는 모습에 하루카는 마코토가 팔베개를 좀더 편히 할수 있도록 움직이며 한숨을 쉬었다. 계속 이러다가 정말 죽는수가 있어. 단번에 피치가 올라가는 낑낑대는 소리. 하루카의 머리 여기저기에 코를 들이밀어 주인의 안녕을 확인하려는 마코토의 머리를 잡고 입을 맞췄다. 저항없이 녹아내려 감겨오는 혀와 몸을 끌어안고 살짝 비릿한 마코토의 냄새를 들이켰다. 너. 오늘은 목욕이야. 커지는 눈과 말려들어가는 꼬리를 무시하며 하루카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레이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뭘. 내 일인걸. 부드러운 목소리에도 레이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바보같은 실수였다. 아름다움과 거리가 너무나도 먼. 오늘따라 배영이 잘 되어 물에 누워 가는 느낌을 잠시나마 만끽하고자 눈을 감았고. 그리고. 확 올라오는 열기에 두통이 한층 더 박차를 가하듯 꽝꽝 울렸다. 많이 아파? 걱정스런 눈길을 받는것만으로도 레이는 땅이 꺼져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정신을 차리고, 놀라 달려온 양호선생님께 검사를 받고,표면적으로는 혹 외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들으며 레이는 그저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병원에 가보는게 좋겠다는 말에 따라나선것은 부장이었던 마코토 선배였다. 중요한 가족모임에 빠질 수 없던 나기사군은 울먹이며 꼭 문자를 해달라며 멀어졌고 망설이던 하루카 선배는 레이의 만류에 마지못한 걸음을 떼었다. 병원에는 혼자서도 갈 수 있었는데. 혼자서 가고 싶었는데. 오늘따라 손님이 많았던 병원에서 똑같이 이상무 판정을 받고 아이스팩을 새로 받아 돌아가는 길엔 어느새 석양의 붉은 빛이 가득했다. 여러가지 아름답지 못한 일들만. 선배한테는 폐만 끼치고. 마코토가 걱정해줄수록 레이는 쩔쩔맸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이 시간까지. 정말.. 선배는 너무 친절하셔서-
그렇지 않아. 드물게 단호한 목소리에 레이는 횡설수설하던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 않아. 레이한테 잘해주는건 그저 잘해주는게 좋아서가 아니란 말이야.
투명한 안경알이 비추는 마코토의 얼굴은 너무나도 붉어서, 붉게 물든 노을과 어우러진 그 모습의 아름다움에 잠시 부끄러움도 잊고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 레이는 생각했다.
늦잠으로 유명한 마코토였지만 마코토가 눈을 떴을때 린은 아직도 곤히 자고 있었다. 마코토의 가슴에 기대어, 입까지 헤 벌리고. 얌전하지 못했던 어제밤을 대변하듯 부스스한 머릿결을 살살 정돈해보는데도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던 린은 마코토가 얼굴을 좀더 잘 보기 위해 몸을 빼려 하자 반사적으로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행동이 사랑스러워 마코토는 조금은 더 이대로 있자며 베게에 다시 머리를 뉘었다. 오늘은 딱히 해야 할 일이 있는것도 아니고. 다른 생각을 하며 이번엔 손끝으로 린의 볼을 찔러보고 눈썹을 건들이는 등 작은 장난을 쳐보던 중 마코토의 손가락이 뾰족한 이빨에 닿았다. 그러고 보면 린의 이빨 때문에 여기저기 자국이 많이 날거라고 생각했는데. 린이 기댄 가슴에는 이빨은 고사하고 키스마크마저 드물었다. 조심해준걸까. 어제밤을 떠올려보던 마코토의 손가락에 갑자기 왕 하고 입이 조여든다. 톡톡 건드리던 뾰족한 이빨이 갇힌 손가락을 빼내려 하면 위협적으로 조여들어 물린대로 가만히 두자 장난스레 두어번 살짝 씹는 시늉을 하더니 하품을 하며 놓아주었다. 아침부터 뭐야, 기분 좋게 자고 있었는데. 벌써 오후야, 린. 잠깐 시계에 놀란 눈길을 준 린은 상관 없다는듯 다시 얼굴을 마코토의 가슴에 파묻었다. 항상 어딘가는 아침이야. 억지스러운 논리에 낮게 웃자 잠이 가득한 눈 하나가 마코토를 흘끗 올려다본다. 그래서. 내 이빨은 왜. 잠깐 당황한 마코토가 머뭇거리자 린의 다른쪽 눈도 뜨였다. 아... 린 이빨이 뾰족한데 생각보다 자국이 덜 남아서. 요즘 수영장에 나간다며. 역시 조심해준것이었나보다. 견습 코치로 나가는거니까, 유니폼에 상의도 있고.. 자국이 남는게 좋단 말이지. 어느새 몸을 일으킨 린이 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움직임으로 마코토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왔다. 너무 아픈건 말고 조금만, 입안에 맴돌던 다음 말은 이불 밑 맨살을 쓸며 조심스레 입술을 깨물어오는 린에 의해 삼켜졌다.
소스케. 쳐진 눈매가 예쁘게 휜다. 자연스레 얽혀오는 손에 소스케의 마음이 녹는다. 사귀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아직 세상이 아름답기만 할 무렵. 끊임없이 쏟아지는 마코토의 스킨쉽에 소스케는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녹아내렸다. 미코시바가 니토리에게 린 선배를 보던 눈길보다 더하다며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연인인데 뭐가 어떻단 말인가. 마코토만 보면 이렇게나 좋은데. 문제는... 스킨쉽 뿐이라는거다. 소스케의 절친이면서 마코토의 오랜 친구라는 이유로 졸지에 연애상담을 해주게 된 린은 떫더름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항상 먼저 다가오는건 마코토인데, 거기서 키스하려거나 하면 피해버리니까... 놀리는 건가?
마코토가? 설마. 못미더운 얼굴로 린이 말했다. 그냥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된거 아냐?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자제하려고 해도 자꾸 먼저 와서 만져주니까 기대하게 되고... 드물게 풀이 죽은 소스케를 징그럽다는 얼굴로 바라보던 린은 무언가 짚이는듯 입을 열었다. 어떤 스킨쉽인데? 손잡고, 기대오고. 끌어안고. 허리에 손 감거나 가끔 볼에 뽀뽀도. 기억만으로 표정이 녹기 시작하는 소스케를 현실로 끌어오기 위해 린이 손가락으로 두어번 딱딱 소리를 냈다. 너 지금 잊고있는게 있는데. 마코토는 동생들이 있다고. 나이차이가 많은. 너 마코토네 한번도 안가봤지. 껴안고 물고 빨고 장난도 아니야. 마코토의 스킨쉽은 다음 단계로 가자는 표현이 아니라 소스케를 동생들과 같이 대한 것에서 나온 것이었던 것이다. 외동인 소스케는 그것을 알 길이 없었고. 가족처럼. 그렇게 가까이 대해주었던 것일까. 소스케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간다. 묘한 얼굴로 피식피식 웃어대기 시작하는 소스케를 바라보던 린은 따랑 울린 알람에 핸드폰을 켰다. 소스케가 자기를 불편해 하는것 같다는 마코토의 상담글이다. 누가 커플 아니랄까봐. 린은 핸드폰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빠져든다.
깊은 바다빛을 띈 눈 위로 짙은 눈썹이 무겁게 내려왔지만 황급히 고개를 돌려버린 마코토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처음이 아닌 마코토의 반응에 린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소스케 쪽으로 의문을 담은 팔꿈치를 들이미는것도 하루에게 시답지 않은 질문을 던지던 마코토는 보지 못했다. 그래서 뒤에서 커다란 손이 제 손목을 쥐고 끌어당겼을 때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당기는대로 따라갈수밖에 없었다. 끌려가는 와중에 돌아보자 눈에서 불을 뿜으려던 하루카가 린에 의해 못마땅하지만 누그러진 표정으로 입을 다무는 것이 보였다.
뭐야. 사람이 없는 곳에 이르자 들려온 잔뜩 화가 난 목소리. 잡힌 손목을 잘게 흔들어 대답을 독촉하는것을 애써 외면하며 마코토는 다른 쪽으로 눈을 굴렸다. 왜 자꾸 피하는데. 눈 마주칠때마다 못볼것 본것처럼 그게 뭐야. 사람 기분나쁘게. 마지막 한마디에 마코토의 어깨가 움츠러든다. 차라리 내가 뭘 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내가 너를 때리기라도 한줄 오해하잖...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보라고! 우악스러운 손길에 억지로 들려진 턱과 함께 올라간 시선이 결국 소스케의 시선과 만났다. 심장소리가 갑자기 크게 귓가에 방망이친다.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졌다 하얘졌다 하는 마코토에 소스케가 당황한듯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벌린다.
... 그러니까 왜그러는데.
... 빠질것 같아. 막상 마주치자 눈을 다른곳에 둘 엄두도 못내는 마코토가 홀린듯 올려다보았다. 소...소스케 눈이 바다 같아서... 머뭇머뭇 나온 말에 소스케의 미간이 좁아진다. 린이 지나가듯 말했던 걸까, 소스케의 표정에 잠시 이해가 떠오르는듯 하더니 한층 더 짙은 의문이 깔린다. 나나세는. 하루는 괜찮아. 아이치로는. 니토리 군도 괜찮아. 소스케만 그래. 지금까지는 이런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다른 파란 눈에게는 아무 반응도 없는데 유독 소스케에게만.
도망갈까봐 턱을 꽉 움켜쥐었던 손이 풀린다. 이번엔 소스케가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쪽이다. 역시 기분이 나빴겠지. 고개를 숙인 마코토의 귀에 한층 낮아진 소스케의 목소리가 닿았다.
너는 무슨 고백을 그렇게 하냐.
예상치 못한 대답에 눈을 깜박이는 사이 소스케의 손이 마코토의 목덜미를 찾아 저에게로 끌어당긴다.
십몇년전만 해도 전쟁이 완연했던 어떤 세상 A 나라의 외딴 지역. 개발지역이라 어수선한 길을 한 여자가 긴팔 긴바지에 커다란 겉옷을 입고 베개를 끌어안은 채 걸어왔다. 멀리 앞은 떠들썩하다. 유명한 미대의 몇백~천명 규모의 mt? 대학축제? 가 여기서 열린단다. 여자는 거기서 판다는 스케치북이 목적이었다. 습기가 많은 흙길을 추적추적 걷다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쾌활한 웃음을 짓는 남자가 서있다. 여자와 같은 B 나라 출신이다. 이것저것 물어오는 목소리에 여자는 잠자코 베개를 끌어안으며 얼굴을 가린다. 시선도 맞추지 않는다. 남자는 학생회 멤버로 엠티 스태프. 자연스레 엠티에 왔겠거니 어서 오라며 행사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여자는 따라간다. 계속계속 질문을 던지는 남자한테 외부인한테도 스케치북을 팔까 고민하던 여자는 겨우 얼굴에서 베개를 떼고 스케치북은 어디서 파는지 묻는다. C나라의 말이다. 약간 영어같은 느낌으로 세계공용어... 좀 교육받았다 싶으면 한두마디정도는 하는. 남자는 여자가 유학파구나 하면서 스케치북 판매 담당 교수님께 데려간다. C나라 출신이다. 교수님은 바빠서. 여자가 스케치북 얼마냐 묻자 어떤크기? 겨우 되묻고 다른 일에 불려가신다. 교수님 시간나실때까지 기다리다 퍼뜩 정신이 들어 역까지 달려갔지만 막차는 떠나고 없다. 엉겁결에 엠티 저녁 이벤트까지 머물게 된 여자는 남자와 타 스텝들에 의해 미대생들이 만든 그래픽이 구름에 투영되어 커다란 3d 스크린이 되는걸 감탄하는 눈으로 쳐다보다... 중간은 기억이 잘 안 나고 다시 역으로 향하는 길이다. 아까 한번 다녀갔을 때도 남자는 여자를 따라왔었다. 그때 부슬부슬 내리던 빗줄기가 제법 굵어져 있다. 해가 져서 온통 캄캄한 와중 엠티의 북적한 소리보다 밤늦게까지 하는 작업 소리가 더 가깝게 캉캉 울린다. 남자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서 여자를 끌어안는다. 와닿은 살결이 뜨겁다. 남자는 전쟁 피해자였다. 비를 맞아 열이 오르고 사물 분간이 어려운 와중 캉캉 들려오는 소리가 얼핏 총소리로 들렸나 보다. 오한인지 두려움에서인지 덜덜 떠는 남자를 여자는 겨우 달래 좀 조용한 나무 맡으로 데려갔다. 살아남았다고 생각했을까. 타지에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나 반가웠을까. 처음 만났을때부터 많은 호감과 관심을 보였던 남자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제어가 되지 않는지 여자에게 입맞추면서 더듬다가 살결대신 거칠한 촉감에 멈칫 한다. 옷 밑으로 만져지는 면적의 반 이상은 살이 아닌 흉터였고. 여자는 몸에 큰 화상이 있었다. 얼마나 큰 화상일지 더 만져봐서 알아볼 엄두가 나지 않는지 처음 손이 닿은 허리께만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남자는 그대로 필름이 끊겼다. 남자가 다음날 일어났을때 여자는 없었겠지. 거기서 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