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님은 용의 저주에 걸려 계신다. 작은 새끼용의 모습으로 절대 깨지지 않는 마법의 유리감옥에 갇혀. 용은 통크게도 그 저주를 내린 성에 기거하고 있었다. 우리 성에. 음식이 맛있어서라지만 성안의 보물을 챙겨 날아가기가 귀찮아서인것 같다. 감옥에 대한 신뢰 덕분인지 용은 주로 왕자님이 계신 알현실에서 지냈지만 심심하면 제 몸이 들어갈 수 있는 성의 모든 곳을 휘젓고 다녔다. 그럴때면 나는 왕자님이 갇혀있는 우리에 다가가 왕자님을 지켜보았다. 왕자님에 대한 애틋한 사랑, 그런건 아니다. 왕자에겐 공주가 있는걸. 나와 공주 말고도 성 안 사람들은 용이 없을때면 왕자님을 보러 가곤 했다. 이전보다 훨씬 아담해진 왕자님께서는 용이 있을때는 어쩔지 모르겠지만 없을때는 - 적어도 내가 본 바로는 - 우리를 부수려고 무던한 노력을 하셨다. 성 안 사람들은 모두 노력을 했었다.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현명하신 우리 국왕폐하에서부터 - 그래, 나까지. 볼품없는 시종 나부랭이가 악을 무찌르고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가 아주 없지는 않았으니까, 하는 희망이었다. 그렇지만 모두 번번히 실패하였고, 용은 그 있으나마나한 시도들이 재미있는지 딱히 제제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졸지에 동물원 안 짐승 신세가 된 왕자는 매우 작았다. 가끔 분하신지 고귀한 가슴을 부풀려 작은 불덩어리를 뿜어낼 때면 약간 커보이지만 진짜 용보다 터무니없이 작은 새끼 크기 기준으로일뿐, 그 후엔 여전히 소형견만한, 애틋한 크기 그대로였다.
고작 어린 시종이 저를 빤히 쳐다보자 화가 나는지 나를 향해 불을 내뿜었다. 연속으로 세번이나 불로써 호령하셨다. 그리고 그때마다 커졌다.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오른 나는 왕자님께서 계속 불호령을 내리시는것을 도왔다. 솔직히, 약을 올렸다.
왕자님은 훌륭하게 반응하셨다. 금세 머리 하나를 더 맵시있게 자라내고 내 키를 훌쩍 뛰어넘은 왕자님은 왕자님의 키가 자람에 따라 같이 커진 유리감옥을 향해 불을 뿜다 어떤 깨달음을 얻으셨는지 한곳을 집중적으로 뿜기 시작했다. 무엇으로 내리쳐도 금 하나 보일 기색을 보이지 않던 투명한 유리는 이내 시뻘겋게 달궈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내가 왕자님께 보인 태도는 왕족모독 혐의를 벗어날 수 없었기에 나는 재빨리 알현실을 나왔다. 그리고 돌아오던 용과 마주쳤다. 알현실 안의 소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눈치챈 듯 용은 달려오는 나에게 우선적으로 불을 내뿜고 지나갔다. 재빨리 장식용 갑옷 뒤에 숨었지만 불이 아닌 용의 숨결의 힘 덕분에 벽에 갑옷째로 처박혔다. 그리고 밀려들어온 불길이 갑옷을 고정시켜준 덕에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음미할수 있었다. 죽을것 같았지만 죽지는 않았다. 누구한테 무슨 죄를 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몸부림치다 정신을 차려보니 거한들이 싸우는듯한 괴성이며 울림이 성을 흔드는 중이었다. 무지막지한 포효 후 알현실로 이어지는 거대한 복도로 쏟아져 나온 왕자님은 비틀거리다 발을 헛디뎌 중앙에 위치한 분수대에 몸의 반을 처박으셨다. 불에 달구어진 몸뚱아리가 물에 닿자 수증기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뿜어져 나왔다. 나는 운이 좋은지 나쁜지는 모르겠으나 그 분수 가까이에 박혀있었으므로 왕자님을 흐릿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먼저 나온 물이 어떻게 되었건 분수대 꼭지는 물을 뿜어내는 제 일을 충실히 하고 있었고 물에 의해 몸이 식어감에 따라 왕자님은 기력을 잃고 계셨다. 그제서야 커다란 소리에 놀란 성안 사람들이 하나 둘 현장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사랑의 힘은 위대한 것 같다.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왕자님의 이름을 부르며 알현실로 뛰어들어갔다. 목소리로 보아 공주님이셨다. 저 안에 무엇이 있는걸까. 아직까지 용의 소리가 들리건만 공주님의 목소리는 이내 기쁨으로 가득찼고 그대로 달려나오더니 분수대의 왕자님을 발견하셨다. 솔직히 몇십배는 크고 머리가 하나 더 있지만 비늘 색깔은 똑같았기에 왕자님이라 생각하시는것 같았다. 이내 죽어가는 자신의 사랑에게 용을 퇴치하신 분, 용을 제 감옥에 가두신 분, 악에 굴하지 않고 이겨낸 저의 용사님, 온갖 미사여구를 뿜어내는 공주님께 실례지만 왕자님을 살리려면 용의 약을 올려 이쪽으로 데려오는 길밖에 없다고 미천한 시종으로서 아뢰었다. 솔직히, 악을 썼다. 불로 커졌고 물로 죽어가니 다시 불을 쬐면 살아나지 않을까 하는 미친 생각이었다. 안그래도 상태가 좋지 않던 왕자님 덕분이었는지 공주님은 시종의 무례함을 관대히 넘어가 주시고는 다시 알현실로 들어가셨다. 곧이어 용이 구르듯 알현실 입구를 통과했고 수증기에 비친 왕자님을 향해 불을 토했다. 음. 뜨거웠다. 2차 화상의 충격으로 내 정신이 깜박이는 동안 왕자님은 그 불로 인해 기력을 찾으셨고 그 기세로 용을 공격해 승리를 쟁취하신듯 했다. 다시 시야가 밝아지자 사방은 용이 아닌 사람 소리로 시끄러웠고 용이 오기 전까지는 그래도 유능하다 칭송을 받던 왕실 마법사가 엄숙한 얼굴로 벽에게서 나와 갑옷의 분리작업을 하고 있었다. 왕실 마법사는 왼쪽 어께에 박혀있던 쇳조각을 빼내며 잘했다 수고했다 칭찬을 했다. 거기까지가 내가 용의 죽음에 날에 대해 기억하는 전부다.
은혜로운 왕자님과 공주님은 천한 시종이 저지른 모독에 가까운 무례를 용서해 주셨고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시종의 활약에 대한 이야기를 알현실의 거대하고 위협적이며 오랜시간 이 성을 고통에 빠트렸던 장본룡과 꼭 빼닮은 새로운 장식물 아래서 영원히 별처럼 빛나실 국왕폐하께 빛나는 시구로 전하신듯 했다. 나는 예의 왕실 마법사께 힐을 받는 영광에 용사라는 황송한 호칭 말고도 온갖 재물을 하사받았다. 그리고 지금. 꿈도 못꾸어본 금화침대에 누워있다. 상상속에서처럼 용을 때려잡지도, 유리감옥을 부수지도 않았던것 때문일까. 그토롱 원하던 결말인것 같은데, 용사라는 칭호가 마냥 거북하다. 부귀와 영화를 쥐었건만 왜 내것이 아닌것 같을까. 왜 나는 행복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