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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글 둘

porifra 2013. 2. 25. 10:51

달이 없는 밤이었다. 달의 그분이 달빛을 보내 아이들을 지킬 수 없는 날이라서인지 샌드맨은 바빴다. 아이들에게 악몽을 보내는 피치를 쓰러뜨리고 그의 보금자리로 향하던 굴의 입구마저 닫힌 것을 확인했지만 샌디는 마음 한구석에 의심을 담아두고 있었다. 한번 돌아온 전적이 있는 악몽의 왕이었으니만큼 신경이 쓰인 것이다. 그의 걱정이 무색하게 달이 없는 밤임에도 세상은 반짝였고 악몽 없는 어둠의 아늑함 속에 거대한 금빛 모래섬은 꿈을 싣고 밤하늘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느리다고 하면 느리다고 할 수 있고 빠르다면 빠른 그 움직임 속에서 그를 발견한 것은 어쩌면 운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닮았으면서도 정 반대의 성질인 피치에게 어떠한 이끌림이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하얗게 얼어붙은 커다란 호수는 달이 없는 밤임에도 시리도록 빛났다. 그 가운데에 미동도 않고 앉아있는 검은 그림자가 샌디의 시선을 잡았다. 샌디가 찾던 악몽의 왕이 있었다. 

마치 지상 위의 달처럼 빛나는 호수 위, 무릎을 턱까지 당겨 두 팔로 감싸 안고 마치... 마치... 그래, 아이처럼. 

수백 년 싸워온 적이건만 피치는 공포의 왕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때때로 아이 같은 모습을 보였다. 자기 키의 배는 되는 피치이건만 샌디는 마치 상처 입은 아이에게 다가가는 것 같다는, 약간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하며 드넓은 호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그 큰 아이에게로 내려왔다. 소리 없는 움직임이었음에도 얼음을 타고 무게가 전해졌는지 피치는 단번에 내려서는 샌디를 돌아보았다. 순간적으로 마주친 공포에 질린 눈빛에 샌디는 그만 감히 땅 위에 다시 얼굴을 나타낸 괘씸한 악몽을 때려눕히려는 생각도 잊고 주춤했다. 공포의 대상은 그가 아니었는지, 어둠 속 작은 태양처럼 빛나는 모습을 인식하자 피치는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느냐는 듯 샌디에게 좀 더 친숙한 평소의 퉁명스런 얼굴을 되찾고 다시 돌아앉았다. 그런 피치를 향해 금빛 채찍을 거머쥐었으나 놀라는 기척도 피하려는 기색도, 심지어는 샌디가 무슨 일을 하는지 돌아보려는 낌새도 나타나지 않는 악몽의 무반응에 샌디는 의아해하며 들었던 손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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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더슨 맨스누지, 혹은 샌드맨에게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이들이 잠을 깨지 않을까 조심조심 꿈의 모래를 보내는 일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고, 다양한 표정을 담아내는 큼직한 얼굴과 짧뚱한 팔, 때때로 곁들여지는 그만의 재주인 꿈의 모래 그림들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이 되었기에 언젠가부터 샌드맨 그 자신마저 자기에게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잊고 지내기 시작했지만 샌드맨에게는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소리를 내 본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할 수 없을 만큼 오래되어 그의 절친한 친우이자 동료인 가디언즈 중에서도 수없는 세월 동안 샌디의 목소리를 들은 이는 없었다. 글쎄, 샌드맨보다 더 나이가 많고 그들 중 가장 오래 샌드맨을 알고 있었던 달의 그분이 들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달의 그분 역시 그렇게 말이 많은 이가 아니었기에 과연 샌디의 목소리를 달의 그분이 들었는지에 대한 답을 얻을 확률이 극히 낫기에 달의 그분도 샌드맨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이들의 목록에 포함하는 것이었다. 
 편의 때문에 점점 쓰이지 않다가 존재조차 잊힌 샌드맨의 목소리는 그의 소유자와 같이 온화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기에 불만이 없었다. 불만을 품기는 커녕 일 대신 꿈의 모래를 이불 삼아 겹겹이 덮고 자기만의 꿈을 꾸는 데에 충실했고 행복해했다.